김규식 — 12월 10일, 외교의 언어로 독립을 일으키다
전쟁은 총으로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약, 성명, 회담, 서한—그 세밀한 문장 사이에서도 역사는 뒤집힙니다. 12월 10일 서거일을 맞아, 외교 현장에서 독립을 밀어 올렸던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의 발자취를 차분히 따라가 봅니다. ✍️

· 핵심: 1919년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외교전, 임시정부 요인(외무·학무·부주석)
· 오늘의 의미: ‘정의·증거·절차’로 식민지 현실을 세계 기록으로 남긴 사람
· 함께 읽기: 신채호 · 이회영 · 윤봉길 · 기념일 캘린더
외교라는 전장: 파리에서 서울까지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뒤, ‘세계의 법정’에서 조선의 주권을 호명하는 일은 누군가의 역할이어야 했습니다. 김규식은 그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봤습니다. 파리강화회의 전후 한국대표단의 독립청원 활동, 임시정부 외무·학무 분야의 기록 정리, 국제 여론을 향한 설득—그의 싸움은 “사실을 정리하고, 증거로 설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감정의 언어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서 그는 조항과 문서, 발언과 표결의 질서를 배웠고, 그 질서 안에서 한국의 이름을 밀어 올렸습니다.
임시정부의 일꾼, 그리고 교육가
임시정부는 전선과 후방, 행동과 기록이 동시에 굴러야 버틸 수 있었습니다. 김규식은 외교문서를 정리하고, 청원서를 보내고, 각국 인사들과 면담을 이어가면서도 교육을 놓지 않았습니다. 독립은 단지 ‘국경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시민을 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서한과 성명 속의 문장들은 청년과 학생에게 ‘왜 우리가 자유를 가져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그의 방식: 정의·증거·절차
- 정의: 조약과 협약, 강제와 위법의 문제를 조목조목 정리
- 증거: 강점의 실태를 문서·통계·증언으로 기록하여 ‘사실’로 제시
- 절차: 회의·의결·청원·면담 등 국제 규범의 절차를 집요하게 통과
이 세 단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종종 ‘목소리의 크기’가 변화를 만든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사실과 성실한 절차가 오래가는 변화를 만듭니다. 김규식은 그 점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타임라인
- 1881.01.29 부산 동래 출생
- 1919 파리강화회의 전후 독립청원 활동
- 1940~1947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 1950.12.10 북만포 인근에서 서거
오늘의 독서 포인트
김규식의 외교는 ‘한 방’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통의 서한, 수십 차례의 면담과 회의,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침묵—오래 버티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지금도 낡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막막할 때, 그는 정의·증거·절차라는 가장 단단한 길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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