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워드: 김원봉, 의열단, 공약 10조
- 포인트: 1919년 11월 9~10일, 비밀결사 의열단 결성
- 의미: 3·1운동 이후 무장투쟁 노선의 분기점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1919년 11월의 밤, 만주 길림에서 젊은 동지들은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1) 왜 11월에 김원봉인가
3·1운동이 남긴 과제는 분명했습니다. “열정은 증명됐지만, 성과를 지속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1919년 11월, 길림의 한 집에 모인 청년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으로 답을 냈습니다. 조직은 작고 은밀했지만, 목표는 대담했습니다. 식민 권력의 심장부를 정확히 겨냥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행동강령은 단호했습니다. ‘공약 10조’, ‘7가살·5파괴’. 표적과 원칙, 규율이 분명했습니다. 11월은 이 결단을 떠올리기에 가장 적절한 달입니다.
2) 김원봉, 어떤 리더였나
김원봉(호 약산)은 냉정한 기획자이자 설득자였습니다. 그는 ‘의거’ 자체보다 의거가 남길 파급 효과를 중시했습니다. 조직이 노출되지 않도록 임무를 쪼개고, 실패했을 때 파장을 최소화하는 연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강조한 건 정확함과 연결성이었습니다. 소수 정예가 치고 빠지는 전술, 이후에는 선전과 연대를 통해 정신적 우위를 넓히는 전략. 이 균형 감각이 의열단을 잠깐의 폭발로 끝나지 않게 했습니다.
3) 의열단 창단의 배경과 방법
3·1운동은 ‘대중의 힘’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식민 권력은 곧 치안유지법 체제로 반응했고, 합법·비폭력 선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이 공백을 파고듭니다.
- 소규모·고강도 작전: 목표를 최고 기관과 핵심 인물·시설로 좁힙니다.
- 조직 보안: 임무 기반의 분업, 정보의 최소 공유.
- 사상적 지주: 1923년 〈조선혁명선언〉(신채호 집필)을 통해 무장투쟁의 철학을 선명히 합니다.
결성 직후부터 의열단은 ‘한 번 크게 터뜨리고 사라지는 폭탄’이 아니라, 끈질기게 흔적을 남기는 네트워크가 되려 했습니다.
4) ‘의열’의 윤리 — 그들은 무엇을 지키려 했나
의열단의 문장은 과격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윤리 기준이 있었습니다. 민간의 생명 보호, 명확한 표적, 책임의 수용. 오늘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무차별’이 아닌 저항권 행사를 고민한 흔적이 읽힙니다. 그래서 의열단은 단지 ‘폭력의 기록’이 아니라, 제한·규율·목적을 갖춘 정치적 저항의 설계도로 남습니다.
5) 오늘의 독자에게 남는 숙제
우리는 결과로 과거를 평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결과만큼 중요한 건 과정의 품격입니다. 의열단의 기록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원칙에 근거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올해 11월, 의열단의 밤을 다시 읽는 일은 단지 기억 행위가 아닙니다. 원칙을 세우고 연결을 만들며, 작은 조직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타임라인 (핵심만)
- 1919.11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 1920~ 요인 응징·기관 타격 시도, 조직 재편 반복
- 1923 〈조선혁명선언〉 발표(무장노선의 선언)
- 이후 김원봉은 의용대·광복군 계열로 전선을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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