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전투의 불꽃 뒤에는 늘 재정비와 통합이 필요합니다. 서일(호: 백포) 선생은 바로 그 **‘승리 이후를 책임지는 리더십’**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만주 북간도에서 교육·종교·군정 조직을 엮어 중광단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로 이어지는 항일 네트워크를 세웠고, 청산리 전투 이후 흩어진 부대를 묶어 대한독립군단을 출범시키는 데 중심을 맡았습니다. 1921년 자유시 참변과 당벽진 참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통합과 책임을 선택했습니다.

한눈에 보는 핵심 요약
- 정체성: 조직 설계자이자 통합 리더(교육·종교·군정 결합)
- 핵심 조직: 중광단(1911) → 대한정의단(1919) → 북로군정서 총재
- 성과: 청산리 전투 이후 병력·거주민의 안전 이동·재편 주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추대
- 최후: 1921년 당벽진 참안 후 자결
-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프로필 카드
- 본명: 서기학(徐夔學) / 호: 백포(白圃)
- 출생: 1881년, 함경북도 경원
- 활동 무대: 만주 북간도(교육·군정), 북만주·연해주 일대
- 주요 직책: 중광단 단장, 대한정의단 지도부, 북로군정서 총재, 대한독립군단 총재
- 주요 관련 사건: 청산리 전투(1920), 자유시 참변(1921), 당벽진 참안(1921)
1) 만주로 향한 이유와 첫걸음
국권을 잃은 뒤, 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교육과 계몽으로 지역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서일 선생도 그 흐름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1910년 강점 이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인맥을 중심으로 사람과 자원을 묶었습니다. 그가 택한 방식은 전면에서 칼을 드는 장수가 아니라, 학교와 조직을 통해 사람을 길러 전선을 오래 유지하는 길이었습니다.
2) 중광단과 대한정의단 — “사람·사상·군정”의 삼각 구조
1911년,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합니다. 학교 설립과 지역 자치, 병력 양성을 결합해 장기전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이를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지부(지단)·군정회를 두고 병력 모집과 훈련을 체계화합니다.
핵심은 단순한 의거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항일 인프라였습니다.
3) 북로군정서 총재 — 청산리 이후를 설계하다
1919년 하반기, 대한정의단 계열은 북로군정서로 개편됩니다. 서일은 총재, 김좌진은 군사 지휘를 맡는 구조가 자리 잡습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둔 뒤, 오히려 일본군의 보복과 토벌은 더 거세졌습니다. 선생은 병력과 주민을 북쪽으로 안전 이동시키고, 식량·보급·편제를 다시 짜면서 전열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불꽃을 피우는 것만큼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4) 대한독립군단 — 흩어진 전선을 다시 묶다
북만주 밀산 일대로 흩어진 여러 무장 단체를 묶어 대한독립군단이 출범합니다. 선생은 총재로 추대되어 연합 지휘 체계를 시도합니다. 이 통합은 병력의 단순 합산이 아니라, 보급·지휘·연락망을 하나로 엮는 작업이었습니다. 지속전(持續戰)을 위한 운영·조직의 정답을 찾으려는 시도였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5) 1921년의 비극 — 자유시와 당벽진
그러나 1921년 초여름, 연해주 자유시에서 한인 무장 세력이 무장 해제를 당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이 여파 속에서 재편을 서두르던 선생의 진영은 두 달 뒤 **당벽진(當壁鎭)**에서 야습을 받아 큰 피해를 봅니다.
그는 지휘 책임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자결을 택합니다. 승리 이후의 재편을 위해 앞장섰던 지도자의 마지막 선택은, 공동체를 자신보다 앞세운 책임의 윤리로 남았습니다.
6) 지금 우리가 배울 점(3가지)
- 통합의 리더십: 전투의 영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연합과 재정비입니다. 서일은 그 빈틈을 채웠습니다.
- 인재·교육의 중시: 학교와 조직은 전쟁터의 뒤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사람을 길러 시스템을 유지해야 승리가 이어집니다.
- 책임의 태도: 위기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승리보다 더 어려운 **‘승리 이후’**를 감당하려 한 지도자의 태도는 오늘에도 유효합니다.
7) 핵심 타임라인
- 1881 경원에서 출생(본명 서기학, 호 백포)
- 1911 만주에서 중광단 조직, 교육·군정 기반 마련
- 1919 대한정의단으로 발전, 군정 체계 정비
- 1919–1920 북로군정서로 개편, 총재 취임
- 1920.10 청산리 전투 승리(군사 지휘는 김좌진, 총괄·지원 체계 정비에 전념)
- 1921 상반기 대한독립군단 결성, 총재 추대
- 1921.6.28 자유시 참변 발생
- 1921.8 당벽진 참안 후 자결
-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8) 자주 묻는 질문(FAQ)
Q. 서일은 전장에서 직접 지휘한 장수였나요?
A. 최전선의 전술 지휘관이라기보다, 조직·보급·재편을 이끄는 총괄 리더에 가까웠습니다. 군정서와 군단의 지휘 구조·연합 체계를 설계했습니다.
Q. 청산리 전투에서 서일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A. 전술 지휘는 김좌진이 맡았고, 서일은 총재로서 지휘 체계 유지, 병력·주민 이동, 보급 재정비 등에 힘을 쏟았습니다. 승리 이후의 지속 전투력 유지가 핵심 역할이었습니다.
Q. 왜 대한독립군단을 만들었나요?
A. 산개된 부대들을 하나의 지휘·보급망으로 묶어 지속 가능한 무장 항쟁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9) 읽고 가는 요약 한 문장
“서일은 불꽃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가려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