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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최수봉의사 불발된 폭탄보다 강력했던 정신, 최수봉 의사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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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7세 청년의 용기가 우리를 울리는 날입니다.


🕯️ 오늘, 우리는 그를 다시 떠올립니다

1921년 7월 8일.
뜨거운 한 여름날, 조용한 형무소 안에서 한 청년이 서 있습니다.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목매달아 형 집행) 날 입니다.**
그의 이름은 최수봉.
그리고 오늘은 바로 그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날,
그의 서거일입니다.

한 줄의 뉴스도 없고, 아무도 조의를 표하지 않았던 그날.
하지만 그날의 진동은 아직도 이 땅의 심장 속에 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를 다시 불러봅니다.


🌱 밀양의 소년, 불꽃을 품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최수봉은
어릴 때부터 강직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유명했습니다.

시대는 어두웠고,
나라의 주권은 점점 빼앗겨갔으며,
청년들의 꿈은 총칼과 탄압에 의해 잘려나가던 시대.

하지만 그는 그 흐름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배움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고,
한 번 꺾인 학교의 길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 3·1운동과 만주의 결심

1919년, 전국적으로 퍼진 3·1만세운동.
밀양 장날, 최수봉은 친구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단순한 ‘청년’이 아닌,
죽음을 준비한 독립운동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 밀양경찰서에 던진 의지의 불꽃

1920년 12월 27일 아침.
밀양경찰서 안에서는 경찰서장이 훈시를 하고 있었고,
그 순간, 창문 밖에서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최수봉이 던진 폭탄.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맙니다.

그는 즉시 인근 민가로 숨어들어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 법정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의연함

법정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나라를 찾기 위해 싸웠을 뿐이며,
그것은 조선인이라면 당연한 의무라 생각한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지만,
검찰은 형이 가볍다며 항소했고,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27세의 청춘.
죽음을 앞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 단단한 의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애 전체가 유언이자 외침이었습니다.

"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살아왔다."
그 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 죽은 뒤에야 받은 훈장

시간은 흘러,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하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며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이름 없는 한 청년이 보여준 진심 어린 저항.
  • 불발된 폭탄 하나가 던진 역사의 충격.
  •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청년이 남긴 가장 큰 울림.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명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국을 사랑한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의 용기는,
지금 우리의 자유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오늘 하루, 그의 이름을 한 번 소리 내어 불러보기.
  • SNS에 그의 이야기를 나누어보기.
  • 현충원이나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기.
  • 자녀와 함께 ‘용기’와 ‘정의’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생각해보며…

불발된 폭탄보다,
그의 정신은 훨씬 더 크고 멀리 날아갔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가 보여준
단 한 번의 외침과 행동을 통해
무엇이 ‘살아있는 정신’인지 배웁니다.

최수봉.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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