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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황마리아선생, 우리나라 의병활동, 하와이 여성들의 지주 독립운동을 이끈대모, 잊지말아야할 역사, 여성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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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고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명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잘 살고 있는지를 항상 기억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선 땅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황마리아 선생입니다.

 

황마리아 黃마리아 (1865~1937)

황마리아 선생은 1903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해,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과 에와(Ewa)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의 사탕수수밭 노동을 위해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인으로써는 처음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간것이고 이렇게 이민 1세대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를 타고 몇시간이면 도착하지만, 저 당시에는 배를 타고 약35일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5월13일에 하와이에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착해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낮이면 사탕 밭에서 살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낼 때 피곤한 몸의 사지가 아프고 결려서
누웠거나 앉았거나 편치 안 해서 전전 불매하던 것이
그들의 정경이었다.
그러한 형편으로 매일 10시간정도 일을 하고 69전을 받아 그날그날을 지냈으며 
그같이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력이 재미한인사회 건설과 조국광복 해외운동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재미한인 50년사, 김원용 지음> 혜안, 2004



이국땅의  낯선 환경의 사탕수수 밭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이민자들은 단 한번도 고국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민자들에게  들려온 일제의 조선 침탈소식은 청천벽력의 일이였습니다.

힘겨웠지만 노동을 이겨낼 수 있었던 정신의 안락처였던 고국이 사라져 버린것이였습니다.

 

아무리 이국땅이라고 해서 조국의 참상에 눈 감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황마리아선생 경술국치를 당한 3년 뒤인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대한인부인회에서 회장을 맡고 처음에는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는 목적을 두고 시작하였지만

자연스럽게 일폰 상품들의 불매 더 나아가 독립을 위한 모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모임이 좀 더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진 계기는 1919년 조국의 3.1만세운동이었습니다.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2주 뒤 황마리아 선생은 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의 부녀 대표 41명을 모아 호놀룰루에서 공동대회를 열고 조국 독립운동의 후원을 위한 대한부인구제회를 다시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3월 29일, 제 2차대회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조국독립운동 후원의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국 부녀를 규합하고
부녀 사회의 운동역량을 이에 집중한다.

둘째, 조국독립운동에 대하여 부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에 봉사하되 우선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에 
착수할 것이며 항일군사운동이 있을 경우에
출정군인 구호사업의 준비로 적십자 임무를 연습하며 재난 동포구제에 노력한다.

셋째, 조국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방침에 대한민국국민회 지도에 따라서
진행한다.


대한부인구제회의 회원들은 부녀자들로 이루어 졌는데 사탕수수노동, 바느질노동, 파인애플 밭노동

떡과 김치등을 판매해 사업경비를 모았고,매년 2불 50센트를 회비로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아 총 20만 달러라는 금액 모금에 성공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이 당시의 1원= 지금의 4만원~5만원 
20만 달러면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황마리아 선생을 비롯해 대한부인구제회에 활약한 부인들은 20만 달러에 이르는 애국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구제 사업 활동을 전개하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외교 선전 사업에 후원금을 보내는 한편 만주의 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총사령부 출정 군인에게 구호금을 보냈습니다.

3·1 만세 운동 때 부상을 입은 애국지사의 가족에게 구제금 1500달러를 보냈으며, 국내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YMCA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구제금을 보냈습니다.

 

1936년 김구 선생 앞으로 100달러의 군인양성자금을 보냅니다.

당시의 100달라는 지금의 40억~50억의 가치입니다.

이외에도 황마리아 선생은 세탁업으로 가정을 돌보는 가운데도, 독립운동을 촉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중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하와이한인협회’ 일원으로 활동하고  1934년 ‘와히아와(Wahiawa) 미감리교회 부인보조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해 재미 한인의 국어 교육과 사회 개량 및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쓰셨씁니다.

독립운동은 일제의 참략으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민족행방운동입니다.

특히나 황마리아 선생의 정신은 여성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인공들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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