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이시영선생.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참 표본이라고 할수 있는 분입니다.
이분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립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말 하는데요.
이런 도덕적 의무를 몸소 보여주신분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청렴결백하셨고 개인적으로도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868년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17세가 되던 해부터 나라를 위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의 국권이 일제에게 피탈되는 과정을 보시고는
도산 안창호 선생과 친형인 이회영선생 등과 함께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게 되고,
1910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족으로 독립운동은 전개하셨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시영선생과 그의 6형제는 대대손손 물려받은
어머어마한 땅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노비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때 이시영선생의 집안 땅은 지금의 명동 일대라고 하는데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억원의 가치라고 합니다.
이시영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는데,
훗날 이곳에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의 역할을 담당하시고
자금조달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지만, 정작 이시영선생과 그 가족들은
모든 돈을 독립운동에 투자하게 되며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진 후 이시영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와 정치인으로 활동하시며
새로운 정부의 부통령을 하게 되는데 이승만의 독재 정권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하시고
1953년 4월 19일 서거하셨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후손들에게 땅하나 못 남겨 주셨다고 하는데요.
선생의 큰손자는 4살때 상해에서 숨지고, 둘째 손자는 성균관대 법정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대학에 진학할수 없었고
큰손녀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지만 현지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다 가난에 시달리던
며느님은 타계하셨다고 합니다.
-해커스한국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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