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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김원식선생/잊지말아야할역사/우리의역사/의병/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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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지식백과

 

 

독립운동가 김원식 선생.

1889.08.27~1940.01.10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동북면군사연락 위원,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길림전만선 반제동맹대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셨던 독립운동가.

 

 

 

선생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1906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꿈꾸었습니다.

1909년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 마련과 조직 확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안동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뒤 만주 봉천성으로 피신하게되었습니다.

 

더이상 평화로운 시위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기도 하였고,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었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이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만주 봉천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교포와 동지들의 지원에 전력을 다 하였습니다.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습니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였으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옛 왕조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나 복벽주의 계열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결국 독립하고 말았습니다.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통의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만대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正義府)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선생은 정의부에 가담하였고, 중앙집행위원에 김동삼, 이광민, 오동진선생들과 함께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농민호조사를 조직하고 산업생산의 증가,

교육의발전, 위생과 보건의 향상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의부 또한 자체내의 분열이 일어나 정의부를 탈퇴하기에 이르렀고, 새로이 혁신의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1934년2월에는 한국혁명당과 화합하여 신한독립당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 의열단등 기타 각지에서

활동하는 민족단체와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벌여오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그 후 1940년 1월10일에 사망하셨습니다.

 

강원도 의병장 김원식선생.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방면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셨던 김원식 선생.

태어나신 날은 미상이나 돌아가신날은 1908년 6월26일입니다.

강원도 금성군 과반리에서 일본군 금성수비대와 전투중 전사하셨습니다.

 

선생은 강원도 춘천 이북의 화천, 양구, 금성, 인제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셨는데

20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충청도 제천에서 금강산까지 북상한 이강년과 합세하여 연합 군사 활동을 벌여

큰 성과를 얻었는데, 수시로 이곳저곳 출몰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로부터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일제에 강력히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20명의 소부대를 이끌고 일제의 일어학교를 불태우고 일제의 공사 문서를 소각하기도 하고,

친일순사 김응국과 이응섭을 총살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담배행상을 가장한 한국인 밀정을 찾아내 체포하기도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원식 선생은 전투 중 전사하였지만,

다행히도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거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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